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라크 데 슈발리에 (문단 편집) == 역사 == 이 요새의 내성은 원래 [[미르다스 왕조]]의 [[쿠르드족]] 계열의 영주가 만든 성이었다가 1차 십자군에 참가한 대영주 중 한 명인 [[트리폴리 백국]]을 세우는 레몽 드 생질이 점령하였다. 당시 레몽 백작은 [[안티오크]]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보에몽 1세|보에몽 드 타란토]] 공작과 [[롱기누스의 창|다투다가 패배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충성을 맹세하고 수복한 제국의 땅을 자신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한 십자군 영주들이 모조리 배신하고 땅을 자신들이 차지한 데에 분개하고 있었으므로 끝까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은 레몽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레몽에게 소수의 제국군을 지원해주고 갓 흘러들어온 십자군 무리와 동행시켰는데, 다시 레반트로 돌아온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싶어 했으므로 동로마 석수들을 동원하여 트리폴리 근처에 있는 이 요새를 확장 건설하였다. 그러나 정작 트리폴리 공략은 삽질만 하다 실패로 끝났고, 결국 초대 트리폴리 백작 자리는 그의 조카가 레몽의 부음을 듣고 찾아와 공성을 마무리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 12세기 중반 성채의 소유권은 [[구호기사단]]에게 양도되었고, 구호 기사단은 이곳을 전략적 거점으로 활용하여 [[이슬람]] 세력에게 타격을 주었다. 심지어 [[살라흐 앗 딘 유수프|살라딘]]도 공성을 실패할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십자군이 쇠퇴하고 맘루크 세력이 강해지던 1271년, 맘루크의 군주 [[바이바르스]]가 인근 12개 요새를 함락한 뒤 이 성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성이었기에 병력상 20:1[* 성을 수호하던 기사와 병사의 숫자가 대략 700명 남짓이었으므로 맘루크 군은 14000에서 15000명으로 추정된다.]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의 공성이 실패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바이바르스에게는 십자군의 세력보다 동쪽의 [[일 칸국]]의 움직임이 위협적이었기에 성 하나에 대군을 투입한 채로 매달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농성을 하고 있는 방어군 역시 그렇게까지 크게 성을 지킬 의지가 없었다. 저렇게 잘 싸우는데 왜 의지가 없는지 의아할 수 있지만, 기사단은 의미없는 싸움에서 [[옥쇄]]하겠다며 버티는 멍청이들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제외한 모든 거점이 함락되었다. 이는 크라크 데 슈발리에 역시 더 이상 전략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했다. 즉 가능하다면 성을 포기하고 전력을 보전해서 다른 십자군 거점으로 후퇴하는게 훨씬 나았고 기사단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바이바르스는 이 부분을 간파했다. 그는 백작 보에몽의 편지를 위조해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 항복하라.'라는 내용을 비둘기로 성 안에 보냈다. 물론 기사단은 이를 속임수인 줄은 알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속은 셈 치고 성을 내주었다. 어쨌거나 무사 철수를 전제로 한 협상이었기 때문에 바이바르스가 기사단의 뒤를 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바이바르스는 약속이나 협상을 잘 깨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여기서 약속을 깨고 기사단의 뒤통수를 쳐도 이득을 더 얻을 일은 없어서인지 약속을 지켰다. 기사단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 이후 바이바르스는 요새를 수리해서 자기가 사용했고, 그 뒤로도 한동안 군대가 주둔하다가 군사적 가치가 없어지자 방치되었다. 이후 일부 민간인들이 요새 안에 들어가 거주지로 삼았는데, 시리아를 보호령으로 획득한 프랑스 정부가 1927년에 거주자들을 싹 몰아내고 원형을 되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